마리아 발토르타의 '나에게 계시된 복음' 저서를 통하여, 교의신학과 성서신학적 신빙성을 밝히고, 더불어 각 챕터마다 연관된 성경 내용을 주해하며 성경공부도 병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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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6장. 겟세마니에서 제자가 되는 카리옷 사람 유다 예수님은 왜 당신을 배반할 사람을 받아 주셨을까? 어스름이 내리는 올리브밭에 노르스름한 분홍빛 겉옷의 젊은이가 내려옵니다. "안녕하십니까, 스승님! 저는 카리옷 사람 유다입니다. 저울에 달아 정하라 하셨지요. 정했습니다. 왔습니다." 예수님은 반기지 않으십니다. "나는 그대를 찾지 않았소, 유다." 54회차에서 돌려보내진 사람이 성문마다 사람을 두고 여러 날 기다리다 제 발로 찾아왔고, 예수님은 서글픈 얼굴로 그를 바라보시며 끝내 이르십니다. "내일 물고기 문 가까이에서 다시 만납시다." 당신을 팔 사람인 줄 아시면서 받으신 것입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오늘은 그 저녁의 대화에서 두 가지를 봅니다. 사랑은 왜 아무도 물리치지 않는가, 그리고 사람은 무엇을 믿고 따라나서야 하는가. 마리아 발토르타의 『나에게 계시된 복음』 1권 제66장으로 들어갑니다. 꿈에 들뜬 얼굴부터 봅니다. "어찌하여 왔소, 유다?" "저는 이스라엘의 나라를 꿈꾸는데 스승님에게서 임금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저 자신을, 또 제가 가진 모든 것을, 곧 능력과 지식과 인맥과 노고를 이스라엘을 다시 세우는 스승님의 사명을 섬기는 데에 바칩니다." 예수님이 답하십니다. "그대는 사람의 생각인 어떤 뜻으로 나를 따르오. 나는 그대가 그 뜻을 단념하게 해야 하오. 나의 나라는 이 세상 것이 아니오." 요한 복음 18장 36절입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하였으면, 내 신하들이 싸워 내가 유다인들에게 넘어가지 않도록 하였을 것이다." 빌라도 앞에서 하실 말씀을 유다에게 먼저 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스라엘에서 나올 다섯을 꼽으십니다. 첫 추종자들, 첫 증거자들, 박해자들, 처형자들, "그리고 나의 배반자도 이스라엘에서 나올 것이오." 유다가 즉시 외칩니다. "모두가 스승님을 배반해도 저는 스승님 곁에 남아 스승님을 지키겠습니다." 다음은 거미줄입니다. "그대가, 유다? 무엇에 이 확신을 두오?" "사람으로서의 제 명예에 둡니다." "거미줄보다 약한 것이오, 유다. 정직하고 충실할 힘은 하느님께 청해야 하오. 사람은 사람의 일을 하오. 영의 일을 이루려면 사람을 죽이고 다시 태어나게 해야 하오." 같은 말을 한 사람이 또 있습니다. 마태오 복음 26장 33절입니다. "모두 스승님에게서 떨어져 나갈지라도, 저는 결코 떨어져 나가지 않을 것입니다." 베드로입니다. 유다와 베드로가 같은 맹세를 했고 둘 다 무너졌습니다. 그런데 끝이 달랐습니다. 까닭이 둘의 맹세 사이에 있습니다. 베드로를 위해서는 다른 분이 미리 하신 일이 있었습니다. 루카 복음 22장 31절부터 32절입니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처럼 체질하겠다고 나섰다. 그러나 나는 너의 믿음이 꺼지지 않도록 너를 위하여 기도하였다." 제 명예에 둔 확신은 거미줄이고 하느님께 청한 힘은 밧줄입니다. 베드로는 제 맹세가 끊어졌을 때 그 밧줄을 붙들고 밖으로 나가 슬피 울었고, 유다는 제 명예가 끊어졌을 때 붙들 것이 없어 밧줄을 제 목에 걸었습니다. 예레미야 17장 5절입니다.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와 스러질 몸을 제 힘인 양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제 힘인 양 여기는 자, 유다가 그날 저녁에 한 말이 그것이었습니다. 다음은 전염병 걸린 사람의 잔입니다. "저를 물리치시는 겁니까, 스승님?" "나는 아무도 물리치지 않소. 물리침은 사랑하지 않는 이의 일이기 때문이오." 요한 복음 6장 37절입니다. "나에게 오는 사람을 나는 물리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물리치지 않으시면서 경고하십니다. "전염병에 걸린 줄 스스로 아는 이가, 아무것도 모르고 그 잔에 입을 대려 다가오는 이에게 무엇을 하는지 생각하시오 하고 말한다면, 그대는 그 행동을 무엇이라 부르겠소? 미움이라 하겠소, 사랑이라 하겠소?" 유다가 답합니다. "사랑이라 하겠습니다." 예수님이 당신을 전염병 걸린 사람에 견주십니다. 당신을 따르는 것이 유다에게는 죽음의 잔이 될 수 있음을 아시고, 그래도 그 자유를 빼앗지 않으시고, 다만 생각하라 하십니다. 사랑은 강요하지 않고 경고합니다. 그리고 책임을 미리 말씀하십니다. "진리를 모르기에 의를 행한다고 믿으며 살인자가 되는 이에게는 적게 책임을 물을 것이오. 그러나 진리를 알고서도 그것을 따르지 않을 뿐 아니라 그 원수가 되는 이에게는 그 책임을 많이 물을 것이오." 루카 복음 12장 47절부터 48절입니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그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주인의 뜻을 모르고서 매맞을 짓을 한 종은 적게 맞을 것이다." 받아 주신 것이 은총이고, 받아 주셨기에 책임도 커집니다. 요한 복음 15장 22절입니다. "내가 와서 그들에게 말하지 않았으면 그들은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자기들의 죄를 변명할 구실이 없다." 다음은 "그다음은"입니다. "저를 받아 주십시오. 저는 죽기까지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죽기까지라! 그렇소. 그것은 맞는 말이오. 그다음은…" "그다음은요, 스승님?" "앞날은 하느님의 품 안에 있소. 가시오. 내일 물고기 문 가까이에서 다시 만납시다." 유다는 죽기까지 따랐습니다. 다만 그 죽음이 스승의 죽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아시면서 그다음을 하느님의 품에 두셨습니다. 왜 받으셨습니까. 왜 아시면서 열둘 가운데 두셨습니까. 요한 복음 6장 70절입니다. "내가 너희 열둘을 뽑지 않았느냐? 그러나 너희 가운데 하나는 악마이다." 아시면서 뽑으셨습니다. 뽑지 않으셨다면 유다에게는 변명이 있었을 것입니다. 나는 부름받지 못했다고. 뽑으셨기에 그에게는 끝까지 길이 있었습니다. 마지막 밤 입맞춤 앞에서도 "벗아" 하고 부르셨고, 그 뒤에도 베드로에게 하신 것과 같은 눈길이 그를 기다렸습니다. 베드로는 그 눈길에 울었고 유다는 그 눈길을 피했습니다. 마태오 복음 27장 3절과 5절입니다. "유다는 그분께서 사형 선고를 받으신 것을 보고 뉘우치고서는, 유다는 그 은돈을 성전 안에다 내던지고 물러가서 목을 매달아 죽었다." 뉘우쳤으나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제 명예를 믿던 사람은 제 명예가 무너지자 하느님의 자비까지 믿지 못했습니다. 그가 거부한 것은 부르심이 아니라 자비였습니다. 마지막은 서글픈 얼굴입니다. 발토르타는 이 저녁의 예수님을 세 번 적습니다. "심각하게, 또 서글프다고 할 만한 얼굴로." "참으로 서글퍼 보이신다." "서글픔에 이를 만큼 심각하시고." 반기지 않으셨으나 밀어내지도 않으셨고, 아시면서 받으셨고, 받으시면서 서글퍼하셨습니다. 그 서글픔이 사랑의 값입니다. 자유를 주시는 분은 그 자유가 당신을 팔 것까지 받아들이셔야 합니다. 그리고 이별의 축복이 이것입니다. "그분의 자비가 그대를 구원하기를 빕니다." 구원이 아니라 자비가 구원하기를. 유다가 끝내 붙들지 않은 그 한마디를 처음 만난 저녁에 이미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나는 아무도 물리치지 않소. 물리침은 사랑하지 않는 이의 일이기 때문이오." "정직하고 충실할 힘은 하느님께 청해야 하오. 사람은 사람의 일을 하오." 교회의 판단입니다. 가톨릭교회교리서 1037항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무도 지옥에 가도록 예정하지 않으신다." 1833년 6월, 서른두 살의 영국 성공회 사제 존 헨리 뉴먼이 시칠리아에서 열병을 앓고 돌아오는 길에 바람이 멎은 배 위에서 시 한 편을 적었습니다. 인자한 빛이여 나를 이끄소서. 그 시에 그는 제 지난날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내 길을 스스로 고르고 보기를 좋아했고, 교만이 내 뜻을 다스렸다고. 그리고 청합니다. 먼 곳을 보여 달라 하지 않겠으니 한 걸음만 이끌어 달라고. 제 명예와 제 눈을 믿던 사람이 그것을 거미줄로 알아보고 하느님께 힘을 청한 기도였고, 그 기도가 그를 열두 해 뒤 가톨릭으로, 뒷날 추기경으로, 2019년 성인으로 이끌었습니다. 유다가 올리브밭에서 하지 않은 것을 그가 배 위에서 했습니다. 오늘 내가 "저는 결코" 하고 맹세하던 것 하나를 떠올리고 그 맹세를 거두십시오. 그 대신 청하십시오. "주님, 제 믿음이 꺼지지 않도록 저를 위하여 기도해 주십시오." 그 청이 거미줄을 밧줄로 바꿉니다. 기억하십시오. 예수님이 배반할 사람을 받아 주신 것은 사랑이 아무도 물리치지 않기 때문이고, 그에게 끝까지 자비로 돌아올 길을 두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사람의 명예에 둔 확신은 거미줄이고 하느님께 청한 힘만이 밧줄이니, 베드로와 유다를 가른 것은 넘어짐이 아니라 그 뒤에 자비를 붙들었느냐였습니다. 다음 회차 제67장 '물고기 문에서 칼날이 부러지는 기적'에서는 이튿날 물고기 문 가까이에서 유다와 다시 만나시는 예수님과 거기서 일어나는 칼날이 부러지는 기적을 읽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