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 발토르타의 '나에게 계시된 복음' 저서를 통하여, 교의신학과 성서신학적 신빙성을 밝히고, 더불어 각 챕터마다 연관된 성경 내용을 주해하며 성경공부도 병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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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4장. 어머니께 작별을 고하고 나자렛을 떠나다. 하느님께서 인간의 애정까지 끊게 만드시는 이유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그런데 이 말씀을 세상에서 맨 먼저 몸으로 치르신 분이 예수님 자신과 그 어머니였습니다. 나자렛의 마지막 저녁, 아들은 어머니의 애정을 두고 떠나야 했고 어머니는 아들을 붙들 수 있는 손을 풀어야 했습니다. 하느님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려면 마지막으로 버려야 할 것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의 애정입니다. 하느님은 왜 그것까지 당신 뜻에 꺾이게 하실까요. 오늘은 그 까닭이 구속이 아니라 자유임을 봅니다. 마리아 발토르타의 『나에게 계시된 복음』 1권 제44장으로 들어갑니다. 먼저 장 전체입니다. 나자렛 집의 작은 방, 저녁. 예수님이 마지막 저녁을 드시고 마리아는 앉지 않고 시중드시며 자루에 겨울 사과와 빵과 치즈를 챙겨 넣으십니다. 예수님은 어머니의 작은 손을 잡아 볼에 대고 손등에 입 맞추시고, 어머니는 작업장의 작업대에 엎드려 우십니다. "엄마!" 예수님이 눈물을 닦아 드리고 텃밭 걸상에 나란히 앉아 말씀하십니다. "엄마, 이 시간은 와야만 했어요. 모든 것은 여기서 시작되었지요. 천사가 왔을 때." 두 분이 일어나 얼굴을 하늘로 들고 주님의 기도를 바치시는데,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소서"에서 여느 때보다 오래 머무십니다. 방에서 흰 포도주에 빵을 적셔 어머니께 드시게 하시고, 남빛 겉옷을 두르고 자루를 메고 달빛에 하얀 골목길로 사라지십니다. 어머니는 문설주에 기대어 "달보다 더 하얗고, 소리 없는 눈물로 온통 빛나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이르십니다. 이것이 마리아의 네 번째 고통이고, 이 가르침은 "하느님의 뜻이 더 높은 사랑을 위하여 서로 내려놓기를 부르시는" 부모와 자식에게 간다고. 핵심은 하나입니다. 하느님의 뜻만이 우리 구원인데, 그 뜻을 따르려면 땅의 모든 집착을 버려야 하고, 그 마지막이 나를 사랑하는 사람의 애정입니다. 그것을 하느님 뜻 아래 두는 이만이 자유롭고, 그 자유 안에서만 사랑은 소유가 아니라 순종이 됩니다. 자루부터 봅니다. 어머니는 아들을 붙들지 않고 아들의 길을 위해 자루를 채우십니다. 애정은 그대로이되 방향이 바뀌었습니다. 하느님이 사람을 부르실 때 맨 먼저 하시는 일이 이것입니다. 창세기 12장 1절입니다.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 아브라함의 믿음은 재물을 버리는 데서가 아니라 아버지의 집을 떠나는 데서 시작되었습니다. 애정은 사람이 가진 것 가운데 가장 강하므로, 하느님보다 위에 놓이면 가장 강한 우상이 됩니다. 다음은 손등의 입맞춤과 작업대의 눈물입니다. 아들이 어머니의 손등에 입 맞추고, 어머니는 작업대에 엎드려 우십니다. 하느님은 이 애정을 없애라 하지 않으셨습니다. 꺾이게 하셨습니다. 모세가 레위 지파를 축복하며 사제직의 뿌리를 이렇게 말합니다. 신명기 33장 9절입니다. "그는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를 두고 '나는 그를 본 적이 없다.' 하며 자기 형제를 외면하고 자기 아들들을 아는 체하지 않았습니다. 정녕 그는 당신의 말씀을 지키고 당신의 계약을 준수하였습니다." 금송아지 앞에서 부모와 형제보다 하느님의 말씀을 택한 지파가 사제 지파가 되었습니다. 어머니의 눈물은 그 사제직의 눈물입니다. 다음은 텃밭의 말씀입니다. "모든 것은 여기서 시작되었지요. 천사가 왔을 때." 열여덟 해 전의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지기를"이 오늘 아들을 내놓으라는 요구로 돌아왔습니다. 예수님이 훗날 하실 말씀이 이 텃밭에서 먼저 살아졌습니다. 마태오 복음 10장 37절입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루카는 더 세게 적었습니다. 루카 복음 14장 26절입니다.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히브리 말에서 미워한다는 것은 덜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부모를 미워하라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보다 아래에 두라는 것입니다. 왜입니까. 하느님의 뜻만이 구원이고,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 하느님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첫째 자리에 다른 것이 앉으면 그 사랑은 곧 소유가 되고, 소유는 붙드는 이도 붙들린 이도 종으로 만듭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애정까지 당신 뜻에 꺾이게 하십니다. 그것이 자유입니다. 사랑은 소유가 아니라 순종입니다. 요한 복음 14장 15절입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 다음은 첫 주님의 기도입니다. 두 분이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소서"에서 오래 머무십니다. 예수님은 이 내려놓음이 당신께는 목숨을, 어머니께는 아드님의 죽음을 내놓는 데서 절정에 이르렀다 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훗날 어머니를 두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르코 복음 3장 35절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어머니를 밀어내는 말이 아닙니다. 아들을 놓아준 어머니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한 첫 사람이므로, 어머니가 두 번 어머니라는 말입니다. 낳아서 어머니, 놓아주어서 어머니. 다음은 친척들의 상식입니다. 예수님은 친척들이 혼인하여 자리 잡기를 바란 것을 상식이라 부르지만 실은 이기심이었다 하시고, 아버지의 뜻 앞에서 뻗대는 이들을 "고집 센 어린 나귀"라 하십니다. 엘리야는 허락했습니다. 열왕기 상권 19장 20절입니다.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작별 인사를 한 뒤에 선생님을 따라가게 해 주십시오. 그러자 엘리야가 말하였다. 다녀오너라." 그러나 예수님은 그 청을 물리치십니다. 마태오 복음 8장 21절부터 22절입니다.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 너는 나를 따라라.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 엘리야보다 큰 분이 오셨기에 요구도 커졌습니다. 예언자를 따르는 것과 하느님을 따르는 것은 다릅니다. 마지막은 문설주와 그 뒤입니다. 어머니는 문설주에 기대어 우시고, 아들은 길모퉁이에서 사라집니다. 그러면 애정을 하느님 뜻에 꺾은 아들은 부모를 버린 아들입니까. 정반대입니다. 예수님은 성전에서 아버지를 선언하신 뒤 나자렛으로 내려가 부모에게 순종하며 지내셨고, 십자가 위에서 마지막 숨을 몰아쉬며 어머니를 챙기셨습니다. 요한 복음 19장 26절부터 27절입니다.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분이 네 어머니이시다. 그 때부터 그 제자가 그분을 자기 집에 모셨다." 하느님을 먼저 사랑하는 이만이 부모를 바르게 공경합니다. 애정이 첫째 자리에 앉은 집에서는 붙드는 부모와 갇힌 자식이 나오고, 하느님이 첫째 자리에 앉은 집에서는 놓아주는 부모와 효자가 나옵니다. 마태오 복음 19장 29절입니다. "내 이름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아버지나 어머니,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모두 백 배로 받을 것이고 영원한 생명도 받을 것이다." 요케벳은 삯을 받으며 제 아들을 길렀고, 한나는 다섯을 더 낳았고, 마리아는 온 교회를 자녀로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머니가 공동 속량자로서, 고통을 영광의 화관으로 바꿀 줄 모르는 모든 어머니를 위하여 우셨다 하십니다. 교회의 판단입니다. 가톨릭교회교리서 2233항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하느님 가족의 일원이 되고 예수님의 생활 방식에 따라 살라는 초대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같은 항은 부모가 자녀가 주님을 따르도록 부르심을 받은 것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감사해야 한다고 가르치며, 39회차의 2232항은 가족의 유대가 중요하지만 절대적인 것은 아니라고 못 박습니다. 교회는 넷째 계명과 첫째 계명을 맞세우지 않습니다. 첫째 계명이 넷째 계명을 바르게 세웁니다. 1835년 10월, 스무 살의 요한 보스코가 수단을 처음 입던 날 어머니 마르게리타가 아들을 따로 불러 말했습니다. 이 옷이 너를 영예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덕의 실천이 영예롭게 한다고. 언젠가 성소가 흔들리거든 이 옷에 욕을 돌리지 말고 벗으라고. 나는 가난하게 태어나 가난하게 살았으니 가난하게 죽고 싶고, 네가 부유한 사제가 된다면 나는 네 집에 발을 들이지 않겠다고. 그리고 열한 해 뒤 그 어머니는 고향을 떠나 토리노의 오라토리오로 와서 거리의 아이들 수백 명의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요케벳처럼 놓아준 아들을 되받은 것입니다. 오늘 두 가지를 하십시오. 부모라면 자녀의 이름을 부르며 "이 아이는 당신 것입니다, 당신 뜻대로 데려가십시오" 하고 기도하십시오. 자녀라면 부모님께 전화 한 통을 드리십시오. 하느님을 먼저 사랑하는 이의 효가 그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느님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려면 마지막으로 버려야 할 것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의 애정입니다. 그것을 하느님 뜻 아래 둘 때 사랑은 소유에서 풀려나 자유가 되고, 놓아주는 부모에게서 효자가 납니다. 다음 회차 제45장 '세례자 요한의 설교와 예수님의 세례'에서는 어머니가 싸 주신 자루를 멘 예수님이 요르단 강에 이르러 사촌 요한 앞에 서시고 하늘이 열리는 장면을 읽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