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 발토르타의 '나에게 계시된 복음' 저서를 통하여, 교의신학과 성서신학적 신빙성을 밝히고, 더불어 각 챕터마다 연관된 성경 내용을 주해하며 성경공부도 병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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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장. 안나의 정결례와 마리아의 봉헌 마리아는 하늘나라에 합당한 완전한 소녀이시다 사십 년 넘게 장롱 깊이 간직해 온 혼인 예복을 다시 꺼내 입은 노부인이 있습니다. 그 품에는 갓난 딸이 안겨 있습니다. 그리고 이날 성전에서 이 아기를 처음 안아 본 백발의 여인이 있는데, 훗날 여든네 살의 나이로 아기 예수님을 한눈에 알아보고 찬미하게 될 바로 그 사람입니다. 마리아 발토르타의 『나에게 계시된 복음』 1권 제6장으로 들어갑니다. 먼저 이 예식이 무엇인지 보겠습니다. 레위기 12장 5절은 딸을 낳은 산모에 대해 "두 주 동안 부정하게 된다. 그리고 피로 더럽혀진 몸이 정결하게 될 때까지 육십육 일 동안 집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고 규정합니다. 합해서 여든 날, 그 뒤에 성전에 올라가 정결례를 드리는 것입니다. 구월에 태어난 마리아로부터 여든 날이면 초겨울, 본문이 그리는 "한겨울의 매서운 공기"와 정확히 맞아떨어집니다. 무대는 예루살렘 성전, 그중에서도 은을 입힌 청동에 수를 놓듯 새긴 니카노르 문입니다. 유다인들의 옛 기록도 산모의 정결례 자리를 바로 이 문으로 전하니, 발토르타는 예식의 장소까지 정확히 짚고 있는 것입니다. 일행이 눈에 들어옵니다. 놀랍게도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이 함께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부모가 마리아의 봉헌길에 동행하고 있는 것이지요. 훗날 처녀 마리아가 잉태 소식을 듣자마자 서둘러 엘리사벳에게 달려간 그 친밀함이 어디서 왔는지, 여기서 그 뿌리가 보입니다. 요아킴은 명절 옷인 짙은 붉은 옷차림으로 새하얀 숫양 두 마리를 끌고, 엘리사벳은 예물 보따리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안나의 차림이 압권입니다. 늘 짙은 옷만 입던 안나가 오늘은 상앗빛 도는 여린 노란색 옷에 금은 띠를 두르고 이마에는 값진 금속판 장식을 얹었습니다. 엘리사벳이 알아봅니다. "언니가 신부였던 그날을 다시 보는 것 같아요." 안나의 대답이 오늘의 첫 보석입니다. "하지만 지금이 그때보다 더 행복하단다." 혼인날을 위해 간직했던 옷을 딸의 봉헌날에 다시 입은 것입니다. 딸을 하느님께 드리는 날이 자기 인생 최고의 혼인날이라는 고백이지요. 때가 되면 어떻게 품에서 떼어 놓겠느냐는 물음에는 이렇게 답합니다. "이 어린것은 우리의 것이 아니야. 하느님의 선물이지. 그러니 이 아이는 그분의 것이야. 우리는 그저 행복한 수호자일 뿐이고." 니카노르 문에서 예식이 치러집니다. 안나는 정결례의 물로 뿌림을 받고, 어린양이 바쳐지고, 사제는 서원의 신실함을 축하하며 둘째 어린양과 밀가루와 빵을 받습니다. 그리고 한 여인을 부릅니다. "마침 한나가 오는구려. 이 아이의 스승 가운데 한 사람이 될 것이오. 아세르 지파, 파누엘의 딸 한나요." 백발의 한나가 아기를 어르고, 아기는 죄 없이 놀란 눈으로 성전의 흰빛과 금빛을 바라봅니다. 활짝 열린 문 곁에서 일행은 안쪽을 들여다봅니다. 금 등불 아래 흰 너울을 쓴 소녀들이 두 줄로 서서 감미로운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안나가 아기에게 약속하듯 속삭입니다. "세 해 뒤면 너도 저곳에 있을 거란다, 나의 백합아." 한나는 내 몸으로 낳은 자식처럼 귀히 여기겠다면서도 한마디를 덧붙입니다. "내 나이가 그리하도록 허락해 준다면요." 그러자 즈카르야가 예언처럼 말합니다. 부인께서 이 아이를 맞아들이게 되실 것이고, 저도 그날 거기 있겠다고 말입니다. 자, 이제 루카 복음 2장 36절과 37절을 펴 보십시오. "한나라는 예언자도 있었는데, 프누엘의 딸로서 아세르 지파 출신이었다. 여든네 살이 되도록 과부로 지냈다. 그리고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 이름도 한나, 아버지도 프누엘 곧 파누엘, 지파도 아세르. 발토르타가 아기 마리아의 스승으로 소개한 바로 그 사람입니다. 우리는 늘 궁금했지요. 이 노예언자는 왜 성전을 떠나지 않았을까. 아기 예수님을 어떻게 한눈에 알아보고 루카 복음 2장 38절대로 "그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하였"을까. 발토르타의 답은 간명합니다. 그 아기의 어머니를 자기 손으로 길렀기 때문입니다. 세 살 마리아를 맞아들인 스승이 그 딸의 아드님을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지요. 나이 계산까지 맞습니다. 백발로 아기 마리아를 안았던 한나가 삼십몇 해 뒤 여든넷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복음서의 가장 신비로운 단역에게 발토르타가 잃어버린 앞 이야기를 돌려준 셈입니다. 환시가 끝나면 예수님의 받아쓰기가 오늘의 주제를 선포합니다. 지혜께서 성전에서 어린 마리아께 외치셨다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는 누구든 나에게 오너라." 잠언 9장 4절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 성경은 이 구절을 "어리석은 이는 누구나 이리로 들어와라"로 옮깁니다. 히브리 말 페티, 곧 단순하고 여린 사람을 라틴어 성경 불가타는 파르불루스, 아주 작은 이, 어린아이로 옮겼고, 발토르타의 본문은 바로 그 오랜 번역 전통을 따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지혜의 초대는 훗날 사람이 되신 지혜의 입에서 이렇게 완성됩니다. 마태오 복음 19장 14절, "어린이들을 그냥 놓아두어라.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마라. 사실 하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마태오 복음 18장 3절은 더 단호하지요.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가톨릭교회교리서 526항도 하느님 앞에서 어린이가 되어 스스로 작아지는 것이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조건이라고 가르칩니다. 하늘나라의 자격은 커지는 것이 아니라 작아지는 것입니다. 그 완전한 본보기가 마리아이십니다. 받아쓰기는 마리아의 눈을 보라고 합니다. 요람의 놀란 눈길, 주님 탄생 예고 때의 수줍은 눈길, 베들레헴의 복된 눈길, 골고타의 찢어지는 눈길, 성령 강림의 찬란한 눈길. 장면은 바뀌어도 "그 눈은 언제나 한결같다"는 것입니다. 분노도 교만도 색욕도 그 눈을 흐리지 못했습니다. 마태오 복음 6장 22절의 말씀 그대로입니다. "눈은 몸의 등불이다. 그러므로 네 눈이 맑으면 온몸도 환하고." 그리고 그 비결이 지난 시간의 열쇠와 다시 만납니다. 마리아처럼 한평생 오직 하느님만을 바라보았기 때문, 아니 "하느님을 늘 기억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어린이 같음이란 유치함이 아니라, 아버지에게서 눈을 떼지 않는 단순함입니다. 이 길을 우리 시대에 다시 걸어 보인 이가 있습니다. 2장에서 만난 마르탱 부부의 막내딸, 리지외의 성녀 소화 데레사입니다. 1873년에 태어나 스물넷에 선종한 이 젊은 수녀는 위대한 성인들의 가파른 완덕의 계단 앞에서 절망하는 대신 성경을 뒤졌고, 바로 그 구절 앞에 멈추었습니다. 아주 작은 이는 누구든 나에게 오너라. 오늘 받아쓰기가 인용한 잠언 9장 4절의 그 옛 번역입니다. 그리고 당시 부잣집에 막 등장한 신문물 승강기를 보고 이렇게 썼습니다. 나는 완덕의 계단을 오를 힘이 없으니, 나를 하늘까지 들어 올려 줄 승강기를 찾았다. 그 승강기는 예수님의 두 팔이라고. 자신을 한없이 작게 만들어 그 팔에 안기는 것, 그가 작은 길이라 부른 이 어린이의 영성을 교회는 정식 신학으로 인정하여, 1925년 그를 시성하고 1997년에는 교회학자로 선포했습니다. 학위 하나 없는 스물네 살 시골 수녀가 아우구스티노와 토마스 아퀴나스 곁에 나란히 선 것입니다. 작아진 사람을 하느님께서 얼마나 높이시는지, 이보다 선명한 증거가 있겠습니까. 그러니 오늘 밤 기도는 어른의 말을 내려놓고 어린이의 말로 바쳐 보십시오. 아버지, 저 여기 있어요. 이 한마디면 됩니다. 계산과 체면과 자격의 옷을 벗고 작아지는 그 순간, 지혜의 초대가 나를 향한 것이 됩니다. 기억하십시오. 마리아를 바라보며 그분께로 가십시오. 하늘 나라는 어린이 같은 이들의 것입니다. 다음 시간에는 제7장, 어린 마리아가 안나 요아킴과 함께하는 나날, 그 입술에 이미 깃든 아드님의 지혜로 찾아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