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 발토르타의 '나에게 계시된 복음' 저서를 통하여, 교의신학과 성서신학적 신빙성을 밝히고, 더불어 각 챕터마다 연관된 성경 내용을 주해하며 성경공부도 병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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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3장. 코라진 가까이에서 나병 환자를 낫게 하시다 예수님은 왜 나병 환자를 손으로 만지셨을까? 호두나무 아래 풀밭에 사람의 형태만 남은 잔해가 엎드려 외칩니다. "당신께서 원하시기만 하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손을 내미시자 그가 발꿈치 위로 물러앉으며 소리칩니다. "저를 만지지 마십시오! 당신을 아끼셔야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나병에 갉아 먹힌 머리에 손가락을 얹으십니다. 말씀 한마디로도 되었을 일을 왜 만지셨을까요. 걸레를 보십시오. 걸레가 바닥을 닦으면 바닥의 더러움이 걸레에 옮아갑니다. 제 몸은 깨끗하게 둔 채 남을 닦는 걸레는 없습니다. 예수님이 그 손으로 보여 주신 것이 이것입니다. 우리 나병을 당신이 받으시고 당신의 깨끗함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 교회가 성탄 때 노래하는 놀라운 교환의 신비입니다. 오늘은 그 교환이 왜 사랑의 참모습이고 왜 정의인지 성경으로 봅니다. 마리아 발토르타의 『나에게 계시된 복음』 1권 제63장으로 들어갑니다. 굴 어귀의 아벨부터 봅니다. 발토르타는 그를 "땅 위를 떠도는 죽음 그 자체"라 적습니다. 갈고리처럼 굽은 손, 소의 발굽 같은 발, 종잇장 같은 살갗 아래로 뚫고 나온 뼈. 그가 이 빠진 사발로 도랑물을 마시고 야생 냉이를 씹습니다. 율법이 그를 거기 두었습니다. 레위기 13장 46절입니다. "그는 부정한 사람이므로, 진영 밖에 자리를 잡고 혼자 살아야 한다." 진영 밖, 혼자. 그런데 예수님이 그 진영 밖으로 가십니다. 아벨을 마을로 부르지 않으시고 호두나무 아래 그의 자리로 내려오십니다. 히브리서 13장 12절부터 13절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당신의 피로 백성을 거룩하게 하시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니 진영 밖으로 그분께 나아가 그분의 치욕을 함께 짊어집시다." 나병 환자의 자리인 진영 밖이 뒷날 십자가의 자리입니다. 교환은 그분이 먼저 그 자리로 내려오시는 데서 시작됩니다. 다음은 벗의 빵입니다. 온 사람은 사무엘, 61회차 텃밭에서 굽은 등이 펴진 그 거지입니다. 그가 예수님께 말합니다. "어느 날 그가 굶주림에 못 이겨 비바람 속에 마을 길까지 나와 개처럼 쓰레기를 뒤지고 있었지요. 저에게는 자루에 마른 빵이 있었는데 그와 반씩 나누었습니다. 그때부터 이레마다 제가 그에게 먹을 것을 대 줍니다. 많으면 많이, 적으면 적게요." 얻어먹는 거지가 제 빵을 반으로 나누었습니다. 제 몫이 줄어든 것입니다. 손해를 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르십니다. "그대는 착하오, 사무엘. 그래서 은총이 그대를 찾아온 것이오. 사랑하는 이는 하느님께 무엇이든 받을 자격이 있소." 반쪽 빵을 잃고 펴진 등을 받았습니다. 잠언 11장 25절입니다. "마실 물을 주는 이는 자신도 흠뻑 마시게 된다." 작은 교환이 큰 교환의 그림자입니다. 아무것도 손해 보지 않으려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고, 반을 떼어 준 거지의 사랑이 사랑입니다. 다음은 만짐, 곧 교환입니다. 마르코 복음 1장 41절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머리에 손을 얹는 일이 율법에 하나 있습니다. 속죄일의 염소입니다. 레위기 16장 21절부터 22절입니다. "아론은 살려 둔 그 숫염소 머리에 두 손을 얹고, 이스라엘 자손들의 모든 죄를 고백하여 그것들을 그 염소 머리에 씌우고서는 광야로 내보낸다. 그러면 그 염소는 그들의 모든 죄를 불모지로 날라 간다." 머리에 얹은 손은 옮기는 손입니다. 백성의 죄가 염소에게로 옮아갔습니다. 그런데 호두나무 아래에서는 거꾸로입니다. 손을 얹으신 분에게 나병이 옮아가고 손 아래 사람에게 깨끗함이 옮아옵니다. 그분이 염소가 되신 것입니다. 이사야 53장 4절부터 5절입니다. "그는 우리의 병고를 메고 갔으며 우리의 고통을 짊어졌다.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악행 때문이고 그가 으스러진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다. 그의 상처로 우리는 나았다." 바오로가 이 교환을 한 문장으로 적었습니다. 코린토 2서 5장 21절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죄를 모르시는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하여 죄로 만드시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의로움이 되게 하셨습니다." 죄를 받으시고 의로움을 주셨습니다. 코린토 2서 8장 9절입니다. "그분께서는 부유하시면서도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여러분이 그 가난으로 부유하게 되도록 하셨습니다." 가난을 받으시고 부유함을 주셨습니다. 갈라티아서 3장 13절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스스로 저주받은 몸이 되시어,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해 주셨습니다." 저주를 받으시고 축복을 주셨습니다. 호두나무 아래의 손이 그 교환의 첫 자리이고, 못 박힐 손이 그 마지막 자리입니다. 그래서 "당신을 아끼셔야지요" 하는 아벨에게 그분은 당신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걸레는 제 몸을 아끼지 않습니다. 즈카르야 3장 4절입니다. "저 사람에게서 더러운 옷을 벗겨라. 보아라, 나는 너에게서 네 허물을 치워 버렸다. 나는 너에게 예복을 입혀 주겠다." 벗겨 낸 더러운 옷을 누가 입었습니까. 그분이 입으셨습니다. 다음은 교환이 정의인 까닭입니다. 사랑은 아픔이고 내어줌이고 죽음이고 더럽혀짐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감상이 아니라 정의입니다. 요한 1서 1장 9절입니다. "우리가 우리 죄를 고백하면, 그분은 성실하시고 의로우신 분이시므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해 주십니다." 자비로우시므로가 아니라 의로우시므로 용서하신다고 적혀 있습니다. 값이 치러졌기 때문입니다. 나병을 받으신 분이 깨끗함을 주시는 것은 정의이고, 값을 치르지 않고 주는 깨끗함은 없습니다. 이사야 53장 11절입니다. "의로운 나의 종은 많은 이들을 의롭게 하고 그들의 죄악을 짊어지리라." 의롭게 하는 것과 짊어지는 것이 한 문장에 있습니다. 그러니 손해 없이 하는 사랑은 정의 밖의 사랑이고, 그 정의 안에서 하는 사랑만이 참입니다. 자비와 정의의 만남이 사랑입니다. 요한 1서 3장 16절입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신 목숨을 내놓으신 그 사실로 우리는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아야 합니다." 요한 복음 12장 24절입니다.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한 알 그대로 남는 것이 손해 없는 사랑이고, 죽는 것이 교환입니다. 아벨은 나았고 "그대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는 말과 "다시는 죄짓지 마시오" 하는 말을 받았습니다. 받은 이에게도 몫이 있습니다. 깨끗함을 받은 사람은 이제 제 깨끗함을 아끼지 않는 걸레가 되어야 합니다. 마지막은 굴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입니다. "사제에게 가시오. 율법이 정하는 대로 하시오." 아벨이 외칩니다. "저는 스승님을 떠날 수 없습니다!" "율법이 바라는 대로 하시오. 그런 다음에 우리가 다시 만나게 될 것이오." 두 벗이 기뻐하며 울고, 아벨은 초승달 아래 그 불행의 소굴로 돌아가 거기서 마지막 하룻밤을 보냅니다. 나은 몸으로 부정한 굴에 들어가 자는 밤, 받은 깨끗함을 순종으로 갚는 밤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이는 하느님께 무엇이든 받을 자격이 있소." "내가 바란다! 깨끗해져라!" 교회의 판단입니다. 가톨릭교회교리서 460항은 아타나시오의 말로 이 교환을 가르칩니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사람이 되신 것은 우리를 하느님이 되게 하시려는 것이다." 1205년 아시시 근처 들길에서 젊은 프란치스코가 말을 타고 가다 나병 환자를 만났습니다. 평생 나병 환자를 보면 코를 막고 돌아가던 사람이 그날 말에서 내려 그에게 다가가 입을 맞추고 돈을 쥐여 주었습니다. 죽기 전에 적은 유언에서 그는 이렇게 돌아봅니다. 주님께서 나를 그들 가운데로 이끄셨고 내가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었으며, 그들을 떠나올 때 쓰디쓰던 것이 몸과 영혼의 달콤함으로 바뀌었다고. 그가 준 것은 입맞춤이었고 그가 받은 것은 회심이었습니다. 더럽혀진 사람이 깨끗해지는 교환, 호두나무 아래의 손이 가르친 그것입니다. 오늘 제 몸을 아끼지 않는 걸레가 되어 보십시오. 코를 막고 돌아가던 사람 하나에게 손을 내밀고, 가진 것을 반으로 나누십시오. 손해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고, 손해 보는 사랑이 받을 자격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예수님이 나병 환자를 만지신 것은 우리의 더러움을 당신이 받으시고 당신의 깨끗함을 우리에게 주시는 교환을 보이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교환은 값을 치른 정의이고, 그 정의 안에서 손해 보며 하는 사랑만이 참 사랑입니다. 다음 회차 제64장 '카파르나움에서 중풍 병자를 낫게 하시다'에서는 지붕을 뜯고 들것을 내려보낸 네 사람의 믿음과 "네 죄는 용서받았다"는 첫 사죄 선언을 읽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