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 발토르타의 '나에게 계시된 복음' 저서를 통하여, 교의신학과 성서신학적 신빙성을 밝히고, 더불어 각 챕터마다 연관된 성경 내용을 주해하며 성경공부도 병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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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1장. 즈카르야의 방문. 요셉의 거룩함과 사제들에 대한 순종 사제가 거룩하지 않아도 순종해야 하는가? 순종은 언제나 구원한다 성모님께서 한 사제의 조언에 순종하십니다. 그런데 성모님 스스로 그 조언이 "모든 면에서 완전하지 않았다"고 하십니다. 왜 완전하지 않은 조언에 순종하셨을까요. 그리고 그 순종이 어떻게 헤로데의 칼에서 아기를 살렸는지, 오늘 성모님께서 친히 풀어 주십니다. 마리아 발토르타의 『나에게 계시된 복음』 1권 제31장으로 들어갑니다. 성가정을 맞아들인 베들레헴의 넉넉한 집, 훗날 동방 박사들이 경배할 그 긴 방입니다. 즈카르야가 헤브론에서 이십오 킬로미터를 올라왔는데 혼자입니다. 요한이 이가 나느라 힘들어하고 날이 매서워 엘리사벳은 오지 못했다고요. 요셉이 굴에서 보낸 첫 며칠을 들려줍니다. 사방에서 드는 바람, 연기 때문에 꺼야 했던 불, 아기를 씻길 더운물도 갈아입힐 마른 옷도 없던 밤들. "마리아는 아기에게 젖과 눈물을, 젖과 사랑을 주었어요." 그때 마리아가 들어옵니다. 굴에서 입던 짙은 옷을 벗고 온통 흰 양털옷에 머리에는 아무것도 쓰지 않은 채, 잠든 예수님을 안고서요. 즈카르야가 깊이 절하고 아기를 받아 안는데, 책은 "성체를 받들어 올리기라도 하듯"이라고 적습니다. 그리고 덧붙이지요. "실제로 그가 두 팔에 받아 안는 것은 성체이시다." 히브리서 5장 1절대로 "사람들 가운데에서 뽑혀 예물과 제물을 바치도록 지정된" 사제가 참된 제물을 처음 안은 것입니다. 마흔 날 뒤 루카 2장 28절에서 시메온이 "아기를 두 팔에 받아 안고 하느님을 찬미"할 그 장면의 예행입니다. 엘리사벳의 선물이 풀립니다. 손으로 짠 양털 이불과 아마포와 작은 옷들, 꿀과 새하얀 밀가루와 버터와 사과와 과자. 책은 그것이 "젊은 어머니를 향한 친정어머니 같은 애틋한 애정"을 말해 준다고 합니다. 그리고 즈카르야의 제안이 나옵니다. 나자렛으로 돌아가지 말고 여기 머물라. 메시아는 다윗의 고을에서 자라셔야 한다. 유다 사람들이 나자렛 사람을 어떻게 여기는지 아시지 않느냐. 산헤드린이 얼마나 트집을 잘 잡는지. 게다가 사제인 내가 스승이 되어 주면 바리사이들이 그분을 더 받아들일 것이다. 이 논리가 얼마나 정확한 예측이었는지 복음서가 보여 줍니다. 훗날 유다 사람들은 요한 복음 7장 42절과 52절에서 정확히 이렇게 말합니다. "성서에 메시아는 다윗의 후손 가운데에서, 그리고 다윗이 살았던 베들레헴에서 나온다고 하지 않았는가?" "성서를 연구해 보시오. 갈릴래아에서는 예언자가 나지 않소." 나타나엘조차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 했지요. 즈카르야의 걱정은 삼십 년 뒤 예루살렘의 반박 그대로였습니다. 그런데 마리아가 이의를 답니다. "메시아께서 나자렛 사람이라 불리시리라고들 하는데요." 마태오 복음 2장 23절입니다. "이로써 예언자들을 통하여 '그는 나자렛 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어느 예언자입니까. 11장에서 본 이사야 11장 1절, "이사이의 그루터기에서 햇순이 돋아나고"의 그 햇순이 히브리 말로 네체르이고, 나자렛이 바로 그 낱말에서 온 이름입니다. 나자렛 사람이란 곧 그루터기에서 돋은 햇순이라는 뜻이었으니, 성경은 베들레헴만이 아니라 나자렛도 품고 있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그래서 훗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그에게 예언들 속의 빛을 보여 주려 애썼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나보다 더 유식하다고 여겼다." 마리아와 요셉이 잠든 아기의 머리 위로 슬픈 눈빛을 주고받습니다. 요셉이 나자렛에서 예수님을 위해 한 일이 마리아의 입으로 열거됩니다. 낮에는 남을 위해 일하고 밤에도 일했고, 가장 좋은 나무와 양털과 아마포를 사고, 벌통을 만들고, 미장일까지 하여 집을 손보고, 요람을 마리아의 방에 두었다고요. 요셉의 대답이 이 장의 제목입니다. "저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저는 마리아의 아픔을 생각해요. 이것만 아니라면 저를 위해서는 마음 쓰지 않을 거예요. 곱절로 일하겠어요, 그뿐이에요. 예수에게 유익하기만 하면 돼요." 마태오 복음 25장 21절의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를 들을 사람입니다. 집회서 2장 1절과 3절이 그의 생애를 요약합니다. "얘야, 주님을 섬기러 나아갈 때 너 자신을 시련에 대비시켜라. 주님께 매달려 떨어지지 마라." 두 사람은 아픈 마음으로 사제를 따르기로 하고, 마리아가 웁니다. "제가 어머니가 된 그 집을 언제나 다시 볼까요?" 받아쓰기에서 성모님께서는 요셉의 거룩함부터 말씀하십니다. 당신은 티 없이 잉태된 이로서 하느님의 선물을 지녔지만 요셉은 인간됨의 무거운 짐을 다 진 채 "완전함을 향해 올라가야 했다"고요. 천사 같은 정결, 인간다운 정직함, 참을성, 부지런함, 평온함, 겸손으로 거룩했고, "예수와 마리아, 이 둘이 그의 천사 같은 사랑이었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두 가지를 눈여겨보라 하십니다. 첫째, 사제인 즈카르야가 사제 아닌 요셉보다 영을 하늘에 덜 두었다는 것. 요한의 탄생 때 사람으로서 생각해 벌을 받았던 그가 이번에도 "자만의 잔뿌리"로 자기가 예수님의 스승이 되리라 여겼다고요. "'스승'께서 스승들을 두실 필요가 대체 있었겠느냐?" 둘째, 그런데도 당신은 "그 사제를, 그 앎 때문이 아니라 그 존엄한 직무 때문에 존중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마태오 복음 23장 2절과 3절에서 세우신 원칙입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자리를 존중하되 사람을 따라 하지 말라는 그 원칙을 어머니가 먼저 사셨습니다. 히브리서 13장 17절도 같은 방향입니다. "지도자들의 말을 따르고 그들에게 복종하십시오. 그들은 하느님께 셈을 해 드려야 하는 이들로서 여러분의 영혼을 돌보아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모님의 결론입니다. "순종은 언제나 구원한다. 비록 받은 조언이 모든 면에서 완전하지 않을지라도 그러하다." 그 증거를 역사로 주십니다. 베들레헴에 머물렀기에 헤로데의 학살이 마태오 2장 16절대로 "베들레헴과 그 온 일대"에 그쳤고, 이집트로 달아나기도 쉬웠다는 것입니다. 나자렛에 있었다면 사탄이 온 팔레스티나의 권세가들을 부추겼을 것이고, 온 나라를 가로질러 이집트로 가야 했으리라고요. 로마서 8장 28절이 이 섭리의 이름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완전하지 않은 조언에 대한 순종도 하느님께서는 선으로 엮으십니다. 이어서 성모님께서는 사제론을 펴십니다. 참된 사제는 늘 하느님의 빛을 받으며, 그렇지 못한 이를 위해서는 기도해야 한다고요. 사도적 불꽃을 잃는 사제는 불행하지만 "그들을 업신여기는 것이 너희에게 허락되었다고 여기는 이 또한 불행하여라" 하십니다. 까닭이 이렇습니다. "그들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참된 빵을 축성하고 나누어 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록 스스로 거룩하지 못할지라도, 지극히 거룩하신 성체와의 그 닿음은 거룩한 성작과도 같이 그들을 거룩하게 만든다." 가톨릭교회교리서 1545항이 그 신학입니다. "속량을 위한 그리스도의 제사는 단 한 번에 완결된 유일한 제사이다. 그러나 그 제사는 오늘날 교회의 성찬 제사 안에 현존한다. 그리스도의 유일한 사제직도 마찬가지이다. 그리스도의 사제직은 그 유일성이 손상되지 않으면서도 직무 사제직을 통해 현존한다." 그래서 1584항은 집전하는 사제의 부당함이 그리스도의 은총을 막지 못한다고 가르치지요. 성모님께서는 사제를 그물이라 부르십니다. "거룩한 사제 하나하나가 영혼들을 하느님께로 끌어당기는 그물이기 때문이다." 루카 5장 10절의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의 그 그물입니다. 그리고 병든 사제, 무덤 속 라자로 같은 사제를 위해 예수님을 부르라 하십니다. "한 사제의 영혼을 구하는 것은 수많은 영혼을 구하는 것이니." 이 존중을 유언으로 남긴 성인이 아시시의 프란치스코입니다. 1226년 세상을 떠나며 남긴 유언에서 그는 이 세상의 죄 많은 사제들이라도 존경하며 그들의 손에 입 맞추고 싶다고 썼습니다. 그들의 손에서만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몸을 보기 때문이라고요. 성모님의 말씀 그대로입니다. 사람이 아니라 손을, 손이 아니라 그 손이 드는 빵을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실천은 두 가지입니다. 오늘 사제 한 사람의 이름을 대고 그를 위해 기도하십시오. 마태오 9장 38절의 명령,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의 실천입니다. 그리고 미루어 둔 조언 하나에 순종해 보십시오. 완전하지 않은 조언이라도, 하느님께서 선으로 엮으십니다. 기억하십시오. 순종은 언제나 구원합니다. 성모님께서는 사제의 앎이 아니라 직무를 존중하셨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제32장, 예수님의 성전 봉헌, 시메온의 팔과 안나의 예언으로 찾아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