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 발토르트의 '나에게 계시된 복음'과 함께 하는 성경 공부

마리아 발토르타의 '나에게 계시된 복음' 저서를 통하여, 교의신학과 성서신학적 신빙성을 밝히고, 더불어 각 챕터마다 연관된 성경 내용을 주해하며 성경공부도 병행한다.

Curated by: 순전한 가톨릭(전삼용 요셉) (87 videos)


Currently Playing: [제9장. 요아킴과 안나의 죽음] '나에게 계시된 복음'과 함께 하는 성경공부

제9장. 요아킴과 안나의 죽음 시련 속에서도 지혜롭게 충실했던 삶 끝의 평온한 죽음 새벽에 해가 떠오를 때 별 하나가 부드럽게 스러지는 것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이 책은 두 노인의 임종을 그렇게 그립니다. 임종의 괴로움이 아니라, 해 뜨는 하늘에 별이 지듯 꺼져 간 생명. 오늘은 죽음을 이야기하는데도 이상하게 마음이 따뜻해지는 장입니다. 마리아 발토르타의 『나에게 계시된 복음』 1권 제9장으로 들어갑니다. 이 장은 특별합니다. 환시가 없고 예수님의 받아쓰기만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마리아께서 성전에 드신 뒤 오래지 않아 찾아온 외조부모의 죽음을, 예수님께서 친히 겨울날의 짧은 황혼에 비유하며 들려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첫머리에 집회서 4장을 길게 인용하십니다. 집회서 4장 11절과 12절을 들어 보십시오. "지혜는 자신의 아들들을 키워 주고 자신을 찾는 이들을 보살펴 준다.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은 생명을 사랑하고." 그런데 이어지는 17절과 18절이 뜻밖입니다. "지혜는 처음에 그와 더불어 가시밭길을 걷고 그에게 두려움과 공포를 몰고 오리라. 지혜는 그를 신뢰할 때까지 자신의 규율로 그를 단련시키고 자신의 바른 규범으로 그를 시험하리라. 그러고 나서 지혜는 곧 돌아와 그를 즐겁게 하고 자신의 비밀을 보여 주리라." 지혜의 학교에는 시련이라는 교과 과정이 있다는 것입니다. 가시밭길과 단련을 지나야 비밀이 열립니다. 지혜가 이끄시는 그 가시밭길은 결국 자신을 믿음을 포기하고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하게 만드는 과정입니다. 받아쓰기는 요아킴과 안나가 그 학교의 모범생이었다며 두 분이 치른 시련의 목록을 폅니다. 들어 보면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정치적 박해로 조상의 땅에서 쫓겨나 가난해진 일. 자식 없이 세월이 스러지는 것을 지켜본 긴 슬픔. 노년에 얻은 꽃이 피는 것을 못 볼까 마음 졸인 일. 그 꽃을 제단에 바치려 가슴에서 뜯어낸 일. 어린것의 웃음소리에 막 익숙해졌는데 더 무거워진 침묵의 집에서 살아야 했던 일. 병과 모진 날씨의 재난과 권세 있는 자들의 횡포. 그리고 홀로 남겨질 아이가 부스러기 유산밖에 못 받으리라는 걱정까지. 책은 이것을 "소박한 살림이라는 약한 성벽을 두드리는 숱한 공성 망치질"이라 부릅니다. 그러나 곧바로 두 분의 응답을 세 번 반복해 새깁니다. "충실함, 충실함, 언제나 하느님께 대한 충실함." 가장 거센 유혹이 무엇이었는지도 밝혀 줍니다. 저물어 가는 노년 곁에 딸을 두고 그 위로를 누리고 싶은 마음이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사람다운 유혹입니까. 그러나 받아쓰기는 단호합니다. "자녀는 부모의 것이기 전에 하느님의 것이다." 그리고 훗날 열두 살 아드님께서 어머니께 하실 말씀을 미리 세워 둡니다. 루카 복음 2장 49절입니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모든 부모가 언젠가 들어야 할 말이지요. 그런데 놀라운 것은, 딸을 내어 드린 그 빈집에서 줄어든 것이 아니라 자라난 것이 있었다는 증언입니다. "두 마음의 거룩함이요, 한 혼인의 거룩함이었다." 이제 임종의 방입니다. 병든 요아킴과 애통한 안나에게 빛이 되어 준 것은 멀리 있는 딸의 작은 옷가지들, 첫 샌들, 변변찮은 장난감들, 그리고 추억이었습니다. 그와 더불어 이렇게 말할 수 있는 평화였습니다. "나는 괴롭다. 그러나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의무를 다하였다." 그러자 죽음의 자리에 세상이 모르는 기쁨이 찾아옵니다. 한평생 고치 속에 닫혀 있던 진리들이 임종의 순간 나비처럼 햇빛 같은 날개를 펴더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두 생명은 "새벽에 해가 떠오를 때 별 하나가 부드럽게 스러지듯" 꺼져 갔고, 예수님께서는 보이지 않는 현존으로 그 베갯머리에 몸을 숙이고 계셨다고 하십니다. 여기서 받아쓰기는 스스로 반론 하나를 세웁니다. 두 분도 아담의 자손인데 어찌 고통 없이 죽을 수 있었느냐. 답이 성경적입니다. 세례자 요한을 보라는 것입니다. 원죄와 함께 잉태되었으나 루카 복음 1장 44절대로 어머니 태 안에서 주님께서 가까이 오시자 "즐거워 뛰놀았"고, 그것만으로 미리 거룩해졌습니다. 태중의 아기도 거룩하게 하시는 분께서, 티 없으신 분을 낳고 기른 어머니에게 은총을 아끼셨겠습니까. 그리고 오늘의 핵심 문장이 떨어집니다. "올바른 양심은 평온한 죽음을 가져다준다. 그리고 성인들의 기도는 그러한 죽음을 얻어 준다." 평온한 죽음의 두 비결, 곧 깨끗한 양심과 거룩한 이의 전구입니다. 실제로 성전의 마리아께서는 성막 앞에서 멀리 있는 부모를 위해 기도하고 계셨습니다. 시편 116편 15절이 이 죽음 위에 도장을 찍습니다. "당신께 성실한 이들의 죽음이 주님의 눈에는 소중하네." 교회는 이 지혜를 기도문에 새겨 두었습니다. 우리가 매일 수십 번 바치는 성모송의 마지막 청원이 무엇입니까. "이제와 저희 죽을 때에 저희 죄인을 위하여 빌어주소서." 성전에서 부모의 임종을 위해 기도하던 마리아의 그 전구를, 교회는 모든 자녀의 임종에 청해 드리는 것입니다. 가톨릭교회교리서 1014항은 이렇게 죽음을 준비하며 살라고 권고하면서, 성모송으로 어머니의 전구를 청하고 임종하는 이의 수호자인 성 요셉께 선종의 은혜를 맡기라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교리서 1011항은 한 성녀의 임종 고백을 그대로 실어 죽음의 정체를 밝혀 줍니다. 소화 데레사의 말입니다. "저는 죽는 것이 아니라 생명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밤마다 교회가 끝기도에서 시메온의 노래를 바치는 까닭도 같습니다. 루카 복음 2장 29절,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교회는 매일 밤 잠자리에서 거룩한 죽음을 미리 연습시키는 것입니다. 올바른 양심이 평온한 죽음을 낳는다는 것을 극한에서 증명한 사람이 있습니다. 1478년 런던에서 태어난 성 토마스 모어입니다. 영국의 대법관까지 오른 그는 임금 헨리 8세의 부당한 요구에 양심상 서약할 수 없다며 모든 지위와 재산을 잃고 런던탑에 갇혔고, 1535년 참수형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기록들이 한결같이 전하는 것은 그 마지막의 이상한 평온입니다. 처형대에 오르면서도 농담으로 사형 집행인을 위로했고, 나는 임금의 좋은 종으로 죽지만 하느님의 종으로 먼저 죽는다는 말을 남겼다고 전해집니다. 목숨을 잃는 자리에서조차 흔들리지 않은 그 평화의 뿌리가 무엇이었겠습니까. 지킬 것을 지킨 양심이었습니다. 교회는 1935년 그를 시성했고, 2000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그를 정치인들의 주보성인으로 선포했습니다. 단두대 위에서도 평온할 수 있다면, 병상의 저녁이야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그러니 오늘 밤 실천은 이것입니다. 잠들기 전 성모송을 딱 한 번만, 아주 천천히 바치되 마지막 구절에 온 마음을 실어 보십시오. 이제와 저희 죽을 때에. 그리고 양심에 걸리는 일이 하나 있다면, 내일로 미루지 말고 오늘 화해하십시오. 평온한 죽음은 임종의 기술이 아니라 오늘 하루를 사는 방식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올바른 양심은 평온한 죽음을 가져다주고, 성인들의 기도는 그러한 죽음을 얻어 줍니다. 잘 사는 사람이 잘 죽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제10장, 성전의 소녀 마리아가 부르는 노래, 하느님 안에서 본 것을 기억하는 영혼의 신비로 찾아뵙겠습니다.


Tracks in this Playlist